왕조실록에 당대를 대표하는 문장가로 이름을 떨치다.

글. 안경애

천지가 어두워지더니 시월인데 서리 내리고

찬바람은 비 머금고 높은 고갯길에 불어오네

낙엽은 방자하게 뒹굴기를 반복하며

바람소리는 섬돌을 치고 깎는 듯

궁한 선비 가난하여 단벌 옷 뿐이라

한 해가 저물어 가니 심정은 더욱 어려운지경일세

반 칸 방에 불 못 때니 얼음장 같고

깨진 잔에 거미줄 친 것 민망스레 보노라

어리석은 아내 나의 생계 소홀함 꾸짖고

헛되이 밝은 창 향해 좀 먹은 책 펼치노라

아녀자들이 어떻게 궁달의 이치를 알까

만사가 하늘에 달렸으니 한 번 빙그레 웃노라

봄은 응당 심한 추위 뒤에 오나니

잠깐 동안 눈을 감고 인내하는 것뿐이네 

조선 중기 문신이자 학자인 소고(嘯皐) 박승임(朴承任, 1517∼1586)의 시 '시월에 오는 비(十月雨)’다. 가난한 선비의 청렴한 삶과 내면이 엿보이는 시(詩)다.

소고는 1517년(중종 12) 영주 두서리(뒤새)에서 부친 박형(朴珩)과 어머니 예안김씨 사이에서 칠형제 중 여섯째아들로 태어났다. 6세 때 어머니로부터 효경(孝經)을 배우면서 “‘효’란 어버이를 지성으로 섬기는 것입니까?” 라고 질문하였고 후에 조부와 부친으로부터 사략(史略)을 배우다가 주 무왕(周武王)의 불의(不義)를 지적하여 듣는 이들을 놀라게 하였다는 어릴 적 일화가 전해진다. 가학(家學)으로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비롯한 유학(儒學)경전을 두루 공부했는데 15세에 이미 서전(書傳)을 배웠으며 16세에는 송나라 제현(諸賢)의 성리서(性理書)를 읽고 이를 분류하기도 하였다.

18세인 1534년(중종 29) 가을에는 한성시(漢城試)에 응시해 장원함으로써 전국에 이름을 떨쳤다. 20세에는 천체에 운행과 위치를 측정하는 선기옥형(璇璣玉衡)을 만드는 등 시문(詩文)뿐 아니라 천문(天文),역학(易學)에 대해서도 연구했다. 소고는 21세부터 퇴계에게 주역과 성리학을 배웠는데 28세 때인 1544년(중종 39) 스승 퇴계와 함께 *사가독서(賜暇讀書)의 영예를 얻었다. 이때 선발된 인원은 모두 당대의 명사들로 그 중 소고가 가장 어린나이였다. 스승과 함께 *호당(湖當)의 동창이 된 것이다. 이런 까닭에 퇴계는 소고를 제자이기 보다 함께 공부하는 문우(文友)로 대했다.

*사가독서(賜暇讀書) : 조선시대에 국가의 유능(有能)한 인재를 양성하고 문운(文運)을 진작시키기 위해 젊은 문신(文臣)들을 뽑아 휴가(休暇)를 주어, 독서당(讀書堂)·호당(湖當)에서 공부(工夫)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한 일.

31세 때인 1547년(명종 2), 당시 외척으로서 정권을 잡고 있던 윤원형(尹元衡)세력이 반대파 인물들을 숙청한 사건인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이 일어나 사류(士類)들을 일망타진하면서 소고를 중률(重律)로 다스리고자 했으나 이기의 조카이며 이행의 아들인 이원록이 “소고는 명류(名流)인데 무고한 사람을 끌어넣으면 안 된다.”고 적극 만류해 파직만으로 끝난 일도 있었다. 퇴계는 소고의 아우 박승륜에게 ‘청백전가(淸白傳家)’라는 네 글자를 써줬다. 이는 소고 가문이 청백정신을 이어온 가문이라는 의미다. 

또, 퇴계는 소고를 일러 ‘영유소고 풍유금계(榮有嘯皐 豊有錦溪)’라고 했다. 퇴계의 편지에서 유래한 이 문구(文句)는 영주와 풍기고을을 대표하는 인물로 소고 박승임과 금계 황준량을 일컫는 말이다. 소고와 금계는 동갑으로 생원시에는 금계가 앞선다. 그에 비해 소고는 24세에 생원, 진사시에 모두 합격했다. 양과 합격은 당시에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소고와 금계는 24세에 동방으로 문과 대과에 합격했는데 금계가 을과, 소고는 병과에 들었다. 이 때 셋째형 박승간도 함께 급제하는 영예를 안았다. 퇴계의 제자로 어깨를 나란히 내·외직을 거치던 두 사람은 47세 때 성주목사직을 그만둔 금계가 고향 풍기로 돌아오는 도중 예천에서 유명을 달리하며 비교가 끝났다.

소고는 이후 병조참지와 진주목사, 동지부사, 승정원 도승지, 병조참의, 경주부윤, 전라도관찰사, 황해도관찰사, 강화부사, 여주목사, 춘천부사, 대사간, 창원부사 등을 지냈다. 42세 때 풍기군수로 부임해 훼손된 회헌 안향 선생 영정(影幀)을 다시 그리게 하고, 57세 때는 영주 이산서원(伊山書院)에 퇴계 선생의 위패를 봉안하고 도산에 가서 퇴계 선생 사당건립에 관한 논의를 했다. 58세 때인 1574년(선조 7) 경주부윤으로 임명되었을 때 미암 유희춘이 “애석하다. 국가를 빛낼 솜씨(華國之手)를 가진 사람이 주부(州府)의 소임을 맡았다”라 한 것이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선조실록 8권, 선조 7년 2월 8일 계축 1번째기사]에 있다. 

경주부윤으로 가서는 회재 선생(이언적)을 배향한 옥산서원(玉山書院)을 중수했고, 63세에는 경기도 여주에 기천서원(沂川書院)을 창건하고 모재 김안국을 배향했다. 뒤에 이곳에 회재 이언적. 수몽 정엽, 치재 홍인우, 오리 이원익, 택당 이식, 감사 홍명구 등 현인들을 추향했고 인조 3년에는 사액까지 되었다. 당시 이러한 치적을 어사(御史) 정이주가 임금께 아뢰니 선조는 표리(表裏)를 하사하고 전지(傳旨)를 내리기까지 했다. 감화된 백성들은 뒷날 소고가 유명을 달리하자 경기도 여주에서 경상도 영주까지 조문(弔問) 온 이들도 있었다.

소고는 이미 53세(선조 2)에 동지부사로 중국 연경에 갔을 때 이러한 솜씨를 유감없이 발휘한 바 있다. 당시 조선국왕의 하례 표문(表文)을 받들고 중국에 사신으로 가면 황제의 궐문으로 들어서지도 못하고 문밖에서 예를 행하는 굴욕을 당했다. 이는 중국 측 해당관청 하급관료의 농간으로 이루어진 것이지만 누구도 이를 바로잡지 못했다. 소고는 즉시 이를 중국 예부상서(禮部尙書)에 연락하여 그 정당한 진하(陳賀) 반열(班列)의 위치를 되찾는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다. 이 때 그의 빛나는 문장과 논리가 주효했다. 소퇴계(小退溪)로 추앙받던 대산 이상정은 소고선생 문집 속집 서문에서 선조 때를 대표하는 덕행과 문장가(文章家)로 소재 노수신, 고봉 기대승, 백담 구봉령과 함께 소고를 들고 있다.

왕조실록에 당대를 대표하는 문장가로 이름을 떨친 소고는 1585년 관직에서 물러나 낙향한 이듬해(1586년)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 당시 나이 70세였다.  영주의 *구산정사(龜山精舍)에 제향 되었고, 소고 불천위는 그의 사후 20여년 후인 1600년대 초반에 지역 유림이 공의를 모아 결정한 것으로 소고 불천위를 모시는 사당은 귀내 소고 종택 옆에 위치해 있다. 묘소에는 1629년 10월에 건립한 묘비와 2001년 3월에 개갈(改碣)한 묘비가 함께 서 있다. 생전 김륵 등 60여 명의 후학을 배출하였으며 그 중 9명이 문과에 급제했다. 저서로는 성리유선(性理類選), 공문심법유취(孔門心法類聚), 강목심법(綱目心法)등이 있고 문집인 소고문집이 있다.

소고는 가학과 퇴계 선생을 통해 체득한 성리학적 사유 인식을 기반으로 좀 더 실천적이고 현실적 학문을 공부하여 관계(官界)로 진출하였다. 그래서 정치 발전에 기여하는 한편 만년에는 후진 양성과 흥학사문(興學斯文)에 주력하였다. 생애의 절반 이상을 관직에 있었던 그는 성리학을 기반으로 효제충신(孝悌忠信)의 원리를 몸소 실천한 인물이었다. 이러한 선생의 노력에 의해 조선 중기 영주는 선비의 고장이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다.

*구산정사 : 1767년에 귀강서원(龜江書院)으로 승격되었으며, 흥선대원군 집권 후인 1868년에 훼철되었다. 김담, 박승임, 김륵, 김영조(金榮祖, 1577년-1648년) 등이 배향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