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운동을 선도하고 국난극복에 기여한

영주선비 백암(栢巖) 김륵(金玏)의 발자취를 찾아서

   글. 안경애

사진. 이복현

만리의 관문과 산하 꿈결같이 지났는데 

양진재(養眞齋)의 모습은 요즈음 어떠할꼬 

멀리서 알겠노니 얼어붙은 눈 쓸 사람 없어 

빈 뜨락에는 달빛만 머물러 쓸쓸하겠지

「옥화관에서 양진재를 생각함」 

이 시는 백암 김륵(栢巖 金玏, 1540~1616)이 1602년(선조 35) 63세에 *동지상사로 명나라에 갔을 때 이산 번계마을의 천운정과 양진재를 그리며 쓴 시다. 

김륵의 본가는 본래 구학정(龜鶴亭)이었으나 주위가 번잡하다하여 읍내의 동쪽 이 십리 쯤 되는 동포에 정자를 짓고 천운정(天雲亭)이라 하고, 서당은 동포서당(東浦書堂), 집은 양진재(養眞齋)라 하였다. 천운정에는 선원 김상용(仙源 金尙容)이 쓴 ‘동포서당’ 현판과 석봉 한호(石峯 韓濩)가 쓴 ‘천운정’ 현판이 같이 걸려있다. 영주시 이산면 석포 번계(樊溪)마을은 조선시대 때는 멀암면 석포(石浦) 또는 동포(東浦)로 불려졌다. 

*동지상사(冬至上使) : 조선시대 매년 동짓달에 중국으로 보내던 사신인 동지사 중 우두머리.

어린 시절, 세상을 놀라게 하다.

김륵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예안(禮安) 자는 희옥(希玉), 호는 백암(柏巖)이다. 세종 때 천문학자 문절공 김담(金淡)의 4대손으로 증조부 김만칭(金萬秤), 조부는 증 좌승지 김우(金佑)이고, 부친은 진사 김사명(金士明)인데 형 김사문(金士文)이 아들이 없어 둘째 아들인 김륵을 형의 양자로 보냈다. 백부이자 양아버지 김사문은 형조좌랑(刑曹佐郎)을 지냈다.

김륵이 겨우 글자를 터득할 무렵, 눈이 하얗게 내린 어느 날 부친이 글을 지어보게 하자 ‘설백만동가(雪白萬同家)’라는 글을 써보였다. 만동은 집에서 부리는 하인이었다. 부친이 묻기를 “온 세상이 모두 눈인데 어찌 만동이네 집에만 눈이 내렸느냐?”하니 김륵이 “만동은 미천하여 사람들이 모두 그를 차별하나 하늘은 어느 집이나 차별 없이 눈을 내려 주었기 때문입니다.”라고 답했다. 김륵의 숙부 사호는 안목이 대단한 사람으로 김륵이 후에 가문을 크게 일구리라는 믿음이 있어 선조(先祖)의 묘갈(墓碣)을 세우면서 비(碑)에 글씨를 새기지 않은 백비(白碑)를 세워 어린 김륵의 장래를 기대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13세부터 김륵은 소고 박승임(嘯皐 朴承任)과 금계 황준량(錦溪 黃俊良) 문하에서 수학했다. 소고와 금계는 퇴계 이황(退溪 李滉)이 “영주엔 소고가, 풍기엔 금계가 있다.”라고 했을 만큼 영주와 풍기를 대표하는 학자이다. 김륵은 18세 되던 해 도산(陶山)으로 가 퇴계 문하에 들었다. 

석봉 한호가 쓴 천운정 편액

용호방(龍虎榜)에 들어 조정에 나가다. 

김륵은 21세 때 한성시에 장원을 하고 24세에 생원시에 합격했다. 1564년(명종 19) 25세에 사마시(생원진사시)에 합격했다. 이 과거에서 백암 김륵은 율곡 이이(栗谷 李珥), 서애 류성룡(西厓 柳成龍), 오리 이원익(梧里 李元翼), 학봉 김성일(鶴峰 金誠一), 사양당 심충겸(四養堂 沈忠謙) 등의 걸출한 인재와 함께 합격했다. 사람들은 이때의 *사마방목을 용과 호랑이 명단이라 해서 용호방(龍虎榜)이라 했다. 이들은 모두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에 국난을 극복하고 나라를 이끌어간 중심인물들이다. 

*사마방목(司馬榜目) : 조선시대 생원진사시의 합격자 명부.

양진재 고기와와 참새

사림(士林)의 추대로 이산서원(尼山書院) 원장이 되다. 

고향에 머물던 김륵은 34세의 젊은 나이에 사림(士林)의 추대로 영주 최초의 서원, 이산서원(尼山書院) 원장이 되었다. 순흥에 소수서원(紹修書院)이 있었지만 당시 순흥은 영주군(당시 영천군)과 다른 행정구역인 풍기군에 속했다. 이산서원 원장 김륵은 퇴계의 위패를 이산서원에 봉안하고 1574년에는 사액(賜額)을 받았다. 이산서원은 전국최초로 퇴계를 모신 서원이고 퇴계의 성학십도(聖學十圖)를 간행한 서원이다. 현재 성학십도 목판(木版)은 소수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퇴계가 제정(制定)하고 실행한 이산서원 원규(院規:서원 운영규정) 등은 우리나라 서원의 모델이 되었다. 도산서원(陶山書院) 원규도 이산서원의 원규를 그대로 이어 쓰고 있다. 

​1576년(선조 9) 37세의 김륵은 *승문원에 선발되어 벼슬길에 들어서게 된다. 1578년 검열·전적을 거쳐 예조 원외랑·사간원 정언이 되었다. 1580년 전적 겸 서학교수가 되고 홍문록(弘文錄)에 등록되었고 그 이듬해 부수찬(副修撰)이 되었다. 1584년(선조 17)에는 사헌부 지평(司憲府 持平)에 임명 되었으나 홀어머니 봉양을 위해 지방관으로 보내줄 것을 임금께 청하여 영월군(寧越郡) 군수(郡守)에 제수됐다.

*승문원(承文院) : 조선시대 외교에 관한 문서를 맡은 관청.

양진재 다락 아래 멋스러운 휜 나무기둥

목민관(牧民官)이 되다.

영월 땅에 들어선 김륵은 노산군(魯山君:단종)의 묘를 배알한 후 제청(祭廳)·재실(齋室)·찬청(饌廳)을 묘 옆에 짓고, 처음으로 ‘노산군’이라는 호칭을 신주(神主)에 써서 부인 송씨(宋氏)의 신위와 함께 모셨다. 더불어 단종(端宗)의 시신을 수습했던 엄호장의 자손을 찾아 수묘(守廟)토록 하고 부역을 면제시켰다.

또 영월의 묵은 폐단 10가지를 들어 영월군 진폐소(寧越郡 陳弊疏)를 지어 조정에 올렸다. 상소문에 영월은 고개가 많아 땅이 험준하고 사람은 적은데 부역은 많으니 여러 폐습을 혁파해주기를 청하여 허락받고 선정(善政)을 베푸니, 선조는 의복 일습(守廟)을 내려 포상하고 교서(敎書)하기를 “성심으로 백성을 사랑하고 직분을 다 하는데 게을리 하지 않았다.”라고 치하하였고, 영월군 고을 민들은 김륵이 임기를 마치고 영월을 떠나자 선정비(善政碑)를 세워 그의 덕을 기렸다.  

양진재를 그리며 쓴 시비

안동부사, 안집사를 거쳐 경상우도 관찰사 겸 병마·수군 절도사가 되다. 

1592년 음력 4월 13일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고, 15일 왜군에 포위된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이 전사했다. 이 소식이 조정에 전해진 것은 사흘이 지난 뒤였다. 임진왜란 때 김륵은 형조참의, 안동부사, 경상좌도 안집사(安集使)를 거쳐 경상우도관찰사(慶尙右道觀察使) 겸 병마·수군 절도사(兵馬·水軍 節度使)를 지냈다. 류성룡의 징비록(懲毖錄)에 “김륵이 임지에 이르자 좌도의 백성들이 비로소 조정에 영(令)이 있음을 알고 차츰 모여들었으며 영천(현 영주), 풍기 두 고을에는 적군이 침범치 못하였고 의병들이 크게 일어났다.”고 했다.

김륵은 안집사와 체찰부사(體察副使)로 있을 당시, 한산도와 거제도에서 왜군의 침략을 막아내던 이순신을 비롯한 수군(水軍)의 활약상을 조정에 알렸고, 이후 진주에서 이순신을 만나 대책과 전략을 상의하고 숨져간 병사들의 위령제를 지내는 등 온 힘을 다해 그를 도왔다. 후일 이순신이 투옥됐을 때에는 류성룡 등과 구명운동을 벌였다. 조선왕조실록 1593년 2월 7일자 기록을 보면 “안집사 김륵의 치계(馳啟)에 따라 ‘전라도의 곡식과 종자는 해로를 경류하여 선박으로 경상우도에 수송하고, 우도의 곡식은 좌도로 운송하여 기민구제(饑民救濟)와 파종의 밑천으로 삼으려고 한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실로 백성을 구제하는 계책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라는 내용이 있다. 

시무 16조(時務 十六條)를 상소하고, 명나라로 가서 조선을 알리다. 

1593년 9월 선조가 환궁(還宮)하였다. 김륵은 승정원 도승지에 임명되어 조정으로 돌아가 대사간, 대사성을 거쳐 이조참판과 홍문관 부제학을 지냈다. 1595년(선조 28) 대사헌이 되어서는 나라가 힘들고 어려운 시기에 아무런 계책도 내놓지 않으면서 나라가 안정되기만을 바라고 있음을 안타까워하며 시무 16조(時務 十六條)를 상소했다. 16조는 김륵의 정치사상을 집약한 것으로 임진왜란 후 전쟁의 큰 고비는 넘겼지만,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매우 혼란한 시기에 유의해야할 16가지의 덕목(德目)을 말 한 것이다. 

1602년(선조 35) 동지사로 명나라에 간 김륵에게 명나라 병부(兵符)가 군사 일을 묻자 명쾌하게 대답하니 주위의 모두가 놀라워했고, 명 황제 신종(神宗)으로부터 서책, 비단, 벼루 등을 하사 받았다. 안동부사로 부임해서는 큰 홍수(1605년)로 낙동강이 범람하여 피해가 극심했다. 이에 주변 고을의 장정들을 동원하여 두 개의 큰 제방을 다시 쌓아 수해가 줄어드니 안동 부민들이 송제사적비(松堤事蹟碑)를 세워 김륵의 공을 기렸다.

 파란만장한 생을 마치다.

1608년 즉위한 광해군은 생모를 공성황후로 삼고 별묘를 봉자전(奉慈殿)이라 칭하였다. 이에 김륵은 의절에 문제가 있음을 주장하다가 광해군의 미움을 사 강릉부사로 좌천되었다. 1612년(광해군 4) *김직재(金直哉) 옥사가 일어났고, 이 때 죄수의 집에서 김륵을 지목하는 글이 나와 김륵도 국문을 당했다. 그러나 이항복, 이덕형, 심희수 등이 도와 사직만 당하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말년에 김륵은 자신이 퇴계를 봉안했던 이산서원의 이건을 논의하고 구학정과 천운정, 서벽정(棲碧亭)을 오가며 지내다가 1616년(광해 8) 11월 16일 세상을 떠나니 향년 77세였다. 영주 사림에서는 사당을 세우고 고조부인 문절공 김담, 소고 박승임과 함께 1620년(광해 12)에 위패를 봉안했다. 사당은 후일 구강서원(龜江書院)으로 승격됐다. 최근 이산서원이 이건(移建)·복설(復設)됨에 따라 퇴계 이황, 소고 박승임과 함께 이산서원에 배향되었다. 이조판서에 추증(追贈)되었고, 시호는 민절(敏節)이다. 저서로는 ≪백암문집(栢巖文集)≫이 있다. 

*김직재의 옥(金直哉의 獄) : 1612년(광해군 4) 2월,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대북파(大北派)가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지지하던 소북파(小北派)를 제거하려고 일으킨 옥사(獄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