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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군 감천면 천향1리 “700년 된 청년나무가 사는 마을”
Date : 2022-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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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군 감천면 천향1리 “700년 된 청년나무가 사는 마을”

 

글. 김은경

 

 

 봄은 사시사철 푸른 소나무가 다른 색을 허락하는 계절이다. 햇살에 기대고 싶은 낮이 조금씩 길어지면 소나무는 가지 끝에 연두색의 새잎을 매단다. 연한 새잎이 뭉쳐 나오는가 싶더니 점점 몸을 펴 부채꼴을 만든다. 기존의 짙은 녹색 솔잎과 섞여 자라는 보들보들한 새잎은 낙하를 두려워하지 않는 개구리처럼 자신만만해서 성난 바람에도 살랑거릴 뿐이다. 무구한 얼굴로 허공을 유영하던 새잎은 몇 년이 지나야 튼튼하고 날카로운 잎이 된다. 작고 연약한 것을 강하고 단단하게 키워내며 소나무는 자신이 지나온 시간을 제 안에 쌓는다. 세간에 상관없이 상실의 기별에 흔들림 없이 침묵 속에서 아물기를 반복해 나이테를 하나씩 보탠다. 예천군 감천면의 석송령도 그 길을 따랐다. 다만 엄격하고 꼿꼿한 수도승의 가부좌가 아니라 희로애락을 초월한 생불의 손인사 같은 수형을 가지게 된 것은 곁에 사람들이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마을에서 700여년을 살아온 석송령은 실제로 마을을 단합하게 하는 구심점 역할을 해 왔고, 현재까지도 변함없이 그 역할을 하고 있다. 석송령 공동 돌보기를 비롯해 몇 백년간 이어져 온 석송령 계, 석송령 장학사업 등 마을 주민들은 작은 일에도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던 옛 촌락의 정겨운 모습을 한 그루의 나무를 함께 돌보면서 이어오고 있다. 그래서인지 멀리서 보면 나무 한 그루가 마치 큰 산과 작은 산들로 구성된 산맥으로 보이기도 한다. 산맥을 동그마니 마을 중앙에 옮겨 온 것 같은 형상이랄까... 나무 안에 가까이 들어가 보면 가지와 뿌리가 마치 여러 갈래의 길처럼 큰 산을 떠받치고 있는 형국이다. 600여년이 훌쩍 넘었지만 노송의 느낌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점도 석송령만의 확연한 특이점이다. 나무 아래 서서 나뭇가지를 보고 있노라면 지금도 생장하며 힘차게 뻗어나가는 기세에 그만 압도당하고 마는데, 석송령이 ‘청년나무’라고 불리는 까닭이기도 하다. 

 


 

마을의 희로애락 함께 해온 터줏대감, 석송령

“우리 어릴 때도 나무가 600년 됐다 켔는데, 안즉도 600년 이래. 내가 지금 나이가 벌써 일흔 살이 넘었는데.” 

 

예천군 감천면 천향1리에 사는 김규탁 씨의 말이다. 천향1리에서 가장 오래된 터줏대감을 꼽으라면 마을 주민들은 한그루의 나무를 맨 먼저 꼽는다. 성은 ‘석이고’, 이름은 ‘송령’인 이 나무는 천향 1리의 자연촌락인 벼트리, 귀리, 돌밭, 샘밭, 진밭 등 5개 촌락 중 벼트리, 귀리, 돌밭(석평) 세 촌락의 성황당이다. 오랜 옛날부터 현재까지 마을의 단합과 안녕을 기원하는 동신목으로서 부귀, 장수, 상록을 상징하는 반송으로 둘레가 4.2m, 키가 10m에 이른다. 1982년 천연기념물 제294호로 지정됐다. 

 

사람들에겐 일명 부자나무라고 알려져 있다. 석송령이 있는 천향리 석평 마을은 조선 영조 8년(1732)에 진성이씨, 의성김씨, 안동권씨 삼성이 마을을 개척할 때 수석이 아름답고 바닥에 반석이 깔려 있어 ‘석평’ 또는 ‘석전’이라고 불렀다 한다. 석송령이 있는 마을 입구에는 마을회관, 천향보건소, 경로당 등 마을의 주요 건물들이 자리하고 있다. 

  

“옛날에는 이 동네에 진성이씨가 많이 살았어요. 이 감천면 카는 데가 감천현이었는데, 안동부 소속이었어요. 예천군이 아니었어요. 여기와 살던 사람들이 안동 권씨, 진성 이씨, 의성 김씨였는데, 전부 안동에 살았던 사람들이에요. 1914년도에 왜놈들이 행정구역 개편하면서 예천군으로 귀속했어요.” 

 

마을노인회에서 석송령에 제초작업하는 모습

 

 

석송령이란 이름으로 불리기까지 

석송령이 지금의 자리에 있게 된 데에는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이 하나 있다. 노인회관에서 만난 권영덕 마을이장, 석송령보존회 김규탁 회장, 이동섭 총무, 노인회 김성호 회장을 만나 석송령에 대해 옛 이야기를 들었다. 

 

“약 600여 년 전에 큰 홍수가 났을 때 풍기 지방에서 석관천(石串川)을 따라 떠내려 오던 어린 소나무를 지나가던 나그네가 건져 지금의 자리에 심었다고도 하고, 마을 주민이 건져서 심었다고도 캐요. 우리 마을에는 이런 전설이 없는데 다른 동네에서 이런 얘기가 전해 내려와요.”

 

나무가 위치한 마을이 석평(石坪)이므로 ‘돌석’자를 따서 성으로 삼고, 영험 있는 신령스러운 소나무라고 해서 ‘송령(松靈)’이라고 지었다. 

석송령이 토지를 소유하게 된 사연은 이러하다. 이 마을에 살던 이수목이란 사람이 그의 외아들이 가출한 후 행방불명이 되어 생사를 알 수 없게 되자, 임종을 앞두고 본인 소유의 토지 6,600㎡를 소나무에게 상속하고 세상을 떠났다. 마을 사람들은 그의 뜻을 영원히 기리려고 이 토지를 팔거나 양도하지 않고 석송령 보호재산으로 존속시키기 위해 자연인처럼 이름을 지어 등기를 해두었다. 나무에 인격을 부여한 것은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일이어서 외국 방송사에서도 몇 차례 취재하러 오기도 했다.  

 

새마을사업 당시 퇴비증산을 위해 풀베기 대회를 하는 모습

 

석송령보존회장을 맡고 있는 김규탁 씨가 당시 등기부등본을 펼치며 설명을 이어갔다.

“이 등기를 1927년도에 했어요. 당시에는 일제 강점기잖아요. 그때는 지금처럼 주민등록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자연인처럼 서류를 갖춰 내면 등기가 가능했어요. 그래서 성이 ‘석’씨고, 이름이 ‘송령’이라고 하니까 등기소에서는 그리 알지요 뭐. 그래 등기를 해놓으니까 나무가 자연인이 아니다보니 인감증명을 못하잖아요. 그러니까 영원히 소나무 재산이래. 기존에 등록돼 있는 권한을 뺏을 수 없잖아요. 소나무 앞으로 재산이 있는 건 세계적으로 저 나무 하나뿐이래요.”

지금은 1970년대 새마을사업과 함께 추진한 주변정비사업으로 집과 축사 등이 철거됐지만, 이전에는 여섯 채의 집과 축사가 석송령 토지 안에 있었다. 220근의 벼를 텃도지로 받아서 110근은 석송령 제수비용으로 쓰고, 110근은 토지를 증여한 이수창씨의 묘사비용으로 같은 진성이씨 집안사람에게 주어 제사를 지냈다. 그 후 제사를 지내던 사람이 외지로 떠나자 2004년경부터 마을 사람들이 이수창 씨의 산소에 벌초하고 묘사도 지낸다. 

 

천향노인회 정기총회

 

마을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석송령 계

또 이 마을에선 오래전부터 석송령을 돌보기 위한 계를 조직해 왔다. 집집마다 가입비조로 성금을 내는데 정해진 금액은 없고 저마다 사는 형편대로 냈다. 석송령 계가 언제부터 생겼는지는 알 수 없지만, 현재 남아있는 계문서 중 가장 오래된 문서는 1923년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것이 유일하다. 이 문서도 90년이 넘었다. 

 

“처음 계를 시작했을 때가 몇 백 년 됐는지는 몰라도 아마 마을이 생기고부터 일거예요. 이건 서류상이고, 석송령 계가 내려오는 전래는 이게 뭐 석송령이 생긴 이래부터니까요.”

 

권영덕 이장의 말처럼 석송령은 마을의 역사와 그 뿌리를 함께 하고 있다. 그렇게 모인 기금으로 제수를 장만해 매년 정월 대보름날에 미리 선정된 제관 두 명과 동네주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동신제를 지낸다. 제관은 그해 상이나 불행을 당한 일이 없는 사람 중에서 두 명을 정하고, 제관으로 선정된 사람은 목욕재계 후 동신제까지 바깥출입을 삼가야 한다. 석송령 동신제는 마을 최고의 행사이자, 예천의 대표적인 행사로까지 자리매김했다. 

 

 

석송령 동신제

 

동신제를 올리는 축문에는 공동체의 안위와 평안의 내용이 담겨 있는데, 예전에는 축문을 한문으로 읽었다고 한다. 모두가 이해하기 어려운 점을 감안해 김규탁 씨는 9년 전부터 순 한글로 바꾸어 낭독하고 있다. 마을 어른들의 반대도 있었지만, 아름다운 전통은 고집하되 소통의 변화는 필요하다는 이유에서다. 축문에는 간절한 소망이 담겨 있다.

“지금까지 이런 복지를 만들어줘서 고맙고, 동네 농사 잘 되고 무병장수하게 해주시고, 또 학생들 공부 잘 해서 우리나라에 유용한 인재가 되게 해주시고, 객지에 나가 있는 이 동네 출신들 모두가 편안하게 해달라고 정성껏 빌어요.”

동신제가 끝난 다음 날엔 전 동민이 다 모여서 음복을 하고, 한 해 동안 추진할 마을의 대소사를 의논하고 윷놀이 등 대동회를 한다. 

 

 

마을 사람들 모두를 품고도 남는 그늘

석송령 그늘은 워낙 넓어 마을 사람들 모두를 너끈히 품을 수 있다. 그늘 면적만 324평이나 되는데, 국내에서도 이만한 나무 그늘은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라 고 한다. 

“마을 사람들이 점심 자시고 거기 가서 쉬시다가 오후에 일하러 가기도 했어요.”

아이들에게는 나뭇가지를 타고 올라가 누가 끝까지 갈 수 있나 내기하는 놀이터이기도 했다. 

“거기 가지 끝까지 안 가본 사람들이 없죠. (웃음)”

토박이 김성호 씨가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환히 웃는다.  

“나뭇가지 옆으로 손 놓고 갈 수 있나 없나 그런 놀이도 하고 놀았죠.”

이동섭 씨도 나무의 품에서 개구쟁이 시절을 보냈다. 그렇게 어린 시절을 보낸 마을 주민들은 가지하나 부러질새라 노심초사하는 어른으로 자랐다. 마을 사람들은 눈이 오면 나무 위에 내린 눈을 쓸어내릴 장대 하나씩을 가지고 있을 정도다. 울창한 나뭇가지를 든든하게 받쳐주는 지지대를 마련하기 위해 나무기둥을 깎는 것도 모두 주민들의 일이었다. 

“당시엔 동네 사람들이 나무를 길렀어요. 목주할 나무를 베어 와서 썩은 것 교체하고, 전부 동민들이 했죠. 어른들이 풋굿(호미씻이) 음식 먹으면서 윷판도 벌이고...”

이동섭 씨가 어릴 때는 이런 풍경이 흔했다고 한다. 나무를 중심으로 모여서 쉬고, 노는 등 희로애락을 함께 한 것이다. 

“소나무 박사님이 와서 더 이상 지지대도 하지 말고, 자연 상태로 두라고 해요. 그동안 마을 사람들은 나뭇가지 하나도 부러지면 안 됐거든요. 사람도 운동을 해야 근육이 강해지듯이 나무도 바람에 자연스럽게 흔들흔들 그래야 된다고. 우리는 석송령을 나무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신이라고 생각해요.” 

석송령이 이렇듯 장구한 세월을 늘 푸른 나무로 그 위용을 갖출 수 있었던 것은 나무를 소중히 아끼는 마을 사람들의 사랑 덕분이다.

 

 

석송령 동신제

 

 

석송령에 얽힌 영험한 이야기들

마을 주민들이 석송령을 철저히 보호하고 정성껏 동제를 올리는 것은 비단 오랜 전통을 계승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굵게 뻗은 가지만큼이나 녹록지 않은 역사의 고비를 넘길 때 마다 주민들은 이 나무가 언제나 마을의 안위를 지켜줬다고 말한다. 특히나 일제 강점기와 6‧25전쟁 당시 마을 사람들만이 경험했던 기적 같은 일들이 모두 석송령의 영험에서 비롯됐다는 게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일제 강점기 때, 일본 순사가 인부들을 동원해 민족의 정기를 말살하고 일본 군함의 재료로 쓰기 위해 석송령을 베려고 했다. 그들은 톱과 장비로 나무를 베기 위해 석송령 부근의 개울을 건너다 갑자기 자전거 핸들이 뚝 부러지는 사고를 당했다. 그 일로 순사는 목이 부러져 죽었고, 그것을 본 인부들은 겁에 질려 벌목을 중단했다고 한다.

 

또 6‧25전쟁 때는 인민군이 석송령 나무 밑을 야전병원 막사로 사용했는데, 당시 삼천초등학교를 비롯한 인근 모든 지역은 비행기의 폭격을 받아 많은 피해를 보았으나 이 마을만은 어떤 피해도 받지 않았다고 한다. 이동섭 씨는 어릴 때부터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 

 

“당시 인민군들이 일사천리로 넘어오면서 예천전투에서 시간을 많이 끌었어요. 예천을 점령 못해서 일주일 끌었다고.... 삼천초등학교도 폭격을 맞아 학교가 부서졌는데, 이 마을만은 괜찮았다고 어른들이 그래요. 이 위에 진평 1리나 보문면 산성 마을도 그렇고, 한날 폭격을 해서 진평 1리는 그날 죽은 사람이 30여명이나 돼, 제사가 한날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우리 동네는 전쟁통에 다행히 한 명도 죽은 사람이 없었다는 거예요.”

 

 

나무가 주는 장학금

석송령은 이 마을 출신 자녀들에게 장학금을 준다. 1985년도 전두환 대통령이 석송령 보호기금 500만원을 출연했다. 마을에서는 기금을 유익하게 쓰기 위해 석송령장학회 정관을 제정하고 기금을 은행에 예치해 발생하는 이자로 장학금을 지급하기로 한 것이다. 

 

당시 은행금리가 높아 그 이자로 가능했다고 한다. 1986년부터 2003년까지 총 44명의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했다. 마을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차차 사라지면서 2004년 이후에는 지급이 중단됐다가 2014년도에 대학생 1명에게 장학금을 다시 지급했다. 

  

서울에 사는 마을 출신 전재원씨에게 액자 기증

 

서울에 사는 이 마을 출신 전재원 씨는 동네 행사를 할 때마다 잊지 않고 찬조를 보내곤 했는데, 이에 주민들은 석송령 사진을 액자에 넣어 감사함을 표하기도 했다. 석송령은 마을의 영원한 상징이요, 아낌없이 주는 나무로 기억 속에서 푸르게 살아있다. 처음에는 나무에게 토지를 준다는 생각자체가 파격적인 발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취재를 하면서 나무를 대해온 마을 사람들의 경외심이 대단히 깊음을 알 수 있었다. 나무로 인해 받은 평안과 안위를 다시 나무에게 지극 정성으로 돌려주는 것은 자연과 인간의 아름다운 상생 관계를 보여준다. 나무에게 토지를 준다는 생각은 어느 한 사람에게서 나온 생각이 아니라 아버지의 아버지 대(代)로, 또 그 아버지의 아버지의 대로 거슬러 올라가며 나무와 맺어온 이 마을 사람들만의 자연스러운 성정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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