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갤러리]
게시글 보기
종택 이야기 귀봉종택
Date : 2021-12-14
Name : 장 선녀 File : 20211214203841369.jpg
Hits : 172

귀봉종택

(龜峯宗宅)

 글. 박장영

 ❙ 종택이 있는 곳 

귀봉종택은 안동에서 34번 국도를 따라 영덕 방면으로 12km 정도 가면 왼편에 고가들이 즐비한 마을이 나오는데 바로 이 마을에 있다. 이곳은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인데 의성김씨 집성촌으로 의성김씨 중시조의 대․소 종택이 모여 있다. 

 

 

 종택의 규모

이 종택은 중요민속문화재 제267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가옥은 조선 중기의 전형적인 상류층의 가옥양식을 지녔고 가옥의 규모도 어느 정도 클 뿐만 아니라 사랑채, 안채, 대문채, 사당 등으로 구성되어 있어 사대부의 가옥으로서의 구색을 모두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 중기 대부분의 상류층 가옥과 마찬가지로 이 가옥도 역시 ㅁ자형이다. 대문채를 지나 넓은 사랑마당을 가로지르면 바로 사랑채가 보인다. 사랑채는 옆의 아래사랑채와 합하여 그 크기가 정면 10칸 반이다. ㅁ자형의 일반적인 상류층의 가옥들보다는 다소 큰 편이다. 이것은 큰 종가에서 분가한 파종가의 종택으로, 경제적 여유가 상당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귀봉종택 배치도

 

 

사랑채의 구조는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을 기준하여 사랑마당에서 보기에 왼쪽이 5칸 반, 오른쪽이 5칸이며 90cm 정도 높이의 기단 위에 세워져 있다. 중문 왼쪽의 바로 옆은 1칸의 방이다. 이 방 앞에는 난간을 설치하였으며, 난간에서 방으로 들어가는 출입문은 세살문쌍여닫이문이며 안채에서 들어오는 출입문은 없다. 이방의 출입문 아래에는 머름이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이방 옆에는 사랑에 찾아오는 손님을 접대하기 위한 음식물을 준비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되는 정지가 있다. 정지의 출입문은 안채 쪽으로 나있으며 사랑마당 쪽은 판벽으로 되어있다. 정지 옆에는 난간이 설치되어 있는 2칸통인 아랫사랑방이 있으며 난간은 제일 끝 칸 앞에까지 연결되어 있다. 이 방들의 출입문을 세살문인데 하나는 외여닫이문이고 하나는 쌍여닫이문이다. 그리고 방 옆에는 마루방이 있다. 마루방의 출입문은 궁판이 있는 세 살문쌍여닫이문이고 측면은 판벽으로 처리하였으며 판문을 달았다. 그리고 난간의 제일 끝에는 외여닫이 판문이 설치되어 있으며 지붕에는 풍판이 설치되어 있다.

 

중문의 오른쪽은 모두 5칸으로 난간 대신에 툇마루가 설치되어 있으며 이것은 중문 옆에서부터 제일 끝 칸까지 이어져 있다. 중문 바로 옆에 2칸통인 사랑방이 있으며 방 옆에는 사랑마루가 있다. 사랑마루는 모두 4칸통이며 여기로 들어가는 출입문은 사방으로 나 있는데 모두 사분합문이다. 사랑마루의 천장은 대부분의 마루 천장과 같이 연등천장이다. 사랑마루 옆은 1칸의 방으로 되었는데 손님들이 사용하는 방으로 뒷칸과 합하여 2칸통이다.

 

사랑채 (사진. 문화재청)

 

사랑채의 중문으로 들어서면 이 가옥의 안채가 나온다. 안채는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한 생활공간에 역점을 둔 듯하다. 대청마루는 1m 정도 되는 기단 위에 세워져 있다. 기단은 막돌허튼층쌓기의 공법을 사용하였다. 크기는 정면 2칸, 측면 3칸으로 대청 좌측에 있는 안방 보다 측면이 2칸이나 돌출되었다. 대청 오른쪽에는 2칸통의 방과 1칸의 고방이 있다. 2칸통의 방에는 2개의 출입문이 있는데 이중문으로 되어있다. 고방에는 궁판이 있는 세살문쌍여닫이문을 설치하였다.

 

대청 우측에는 2칸통의 안방이 있고 안방 옆에는 1칸 반의 방이 있으며 이 안방 앞에는 2칸의 부엌이 있다. 방 앞에는 대청과 연결되는 툇마루가 반칸 정도 나와서 이어져 있고, 옆의 방은 마루로 연결시키지 않고, 방의 면적을 높여 반칸정도 더 내었고 부엌도 반칸을 더 내어 넓게 하였다. 부엌 아래쪽으로는 사랑채와 안채를 이어주는 우익사이다. 부엌 바로 아래는 수장 공간인 창고이며 창고 아래는 각각 1칸인 2개의 고방, 1칸 방이 배치되어 있다. 익사 끝칸의 방은 사랑마루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대청마루 내부 (사진. 문화재청)

 

우익사와 마주하는 좌익사는 대청마루가 2칸 더 돌출되어 대청과 면한 부분은 반칸으로 안방의 난방을 위한 아궁이가 설치되어 있고 선반이 있어서 수장공간으로서도 활용하고 있다. 아궁이 칸 옆에는 고방이 있으며 고방 옆에는 사랑채의 마루방과 붙어있는 1칸의 방이 있다.

 

사당

 

사당은 본채의 뒤쪽에 있다. 사당은 비록 담장 안에 있으나 가옥 내에서의 중요성을 감안 한 듯 따로 담장을 만들어 일곽을 이루고 있으며 본채보다 높은 언덕 위에 세워져 있다. 사당으로 들어가는 바깥 출입문은 1칸으로 되어있다. 사당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1칸이다. 지붕은 맞배지붕으로 양쪽에 풍판을 설치하여 웅장하면서도 아주 정갈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대문채 (사진. 문화재청)

 

 

대문채는 정면 5칸, 측면 1칸의 규모이다. 중앙의 1칸은 대문칸으로 지붕이 양쪽 칸 보다 더 높게 하여 위엄을 살렸다. 그리고 오른쪽에는 각 칸에 출입문을 설치하여 방으로 만들었으며 왼쪽은 수장 공간으로서 대문과 면한 칸은 판벽으로 처리하였으며 그 옆은 판문을 설치하였다. 

 

귀봉 선생은 말년에 내앞 반변천에 백운정을 짓고 후학들에게 강학하였다. 백운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크기이고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2칸은 온돌방, 4칸은 마루로 구성되었다.

 

백운정은 당대에 많은 명현들이 현판을 게첩하였으며, 특히 퇴계 선생은 ‘朝陽’, ‘二樂’ 2개의 편액을 지었는데 조양은 ‘봉명조양(鳳鳴朝陽)’의 준말로 시경 권아의 시구를 압축한 것으로 ‘어진 인재가 언젠가 때를 만나 일어날 것’이라는 뜻으로 귀봉 선생에 대한 퇴계 선생의 기대가 담겨져 있다. 그리고 ‘二樂’은 논어 옹야(雍也)편에 나오는 공자의 말로 ‘지자요수(智者樂水) 인자요산(仁者樂山)’에 근거한 것으로 이 역시 지인겸비(知仁兼備)의 인물이 되라는 퇴계 선생의 바람이 담겨있다. 

 

 

안채 (사진. 문화재청)

 

 

 

 관련인물

 

1) 김수일(金守一, 1528년~1583년)

선생의 본관은 의성이고 자는 경순이며 호는 귀봉이다. 청계 선생의 둘째 아들로 중종 23년에 내앞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청수한 기품에 문장이 활달하였으며 시문에 능하였다. 일찍 퇴계 선생의 문하에 들어가 심학을 연구하여 밝은 토론으로 스승으로부터 많은 칭찬을 받았다고 한다. 

 

명종 10년에 선생은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향시에도 여러 번 장원하였다. 선생은 향리인 임하 부암에 백운정을 짓고 시문과 강산을 벗하여 유연자적 한아한 생활을 즐기면서 집안 자질(子姪)과 후진을 기르침에 정성을 기울였다. 또한 선생은 집안의 어려운 일들을 돕고 외로운 아이들을 거두어 기르는 등 항상 너그러이 베풀어 친척이 모두 탄복했으며 선함을 기리고 악을 미워함에 강직하고 과단하여 고장 사람들 모두가 공경하고 두려워하였다.

 

선생이 53세가 되던 해인 선조 13년에 부친인 청계 공이 타계하자 무덤 곁에 여막을 짓고 3년을 슬퍼하며 지내니 몸이 몹시 여위였다. 선조 16년에 나라에서 *유일(遺逸)로 천거하여 자여도 찰방(自如道 察訪)에 임하였으나 이 해에 타계하니 향년 56세이다. 선생 사후에 형제와 더불어 사빈서원(泗寶書院)에 배향되었고 유작은 연방세고(聯芳世稿)로 간행되었다.

 

*유일(遺逸) :조선시대 초야에 은거하는 학덕있는 인물을 찾아 천거하는 인재 등용책. 

 

안채 (사진. 문화재청)

 

 

2) 김용(金涌, 1557년~1620년)

본관은 의성이고 자는 도원(道源), 호는 운천(雲川)이다. 김예범(金禮範)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생원 김진(金璡)이고, 아버지는 귀봉 김수일(金守一)이며, 어머니는 사과(司果) 조효분(趙孝芬)의 딸이다. 김성일(金誠一)의 조카이다.

 

선조 23년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권지정자(承文院權知正字)를 거쳐 예문관검열로 옮겼다가 천연두가 발병해 사직하였다. 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향리인 안동에서 의병을 일으켜 안동수성장에 추대되었고, 이듬해 예문관의 검열·봉교, 성균관의 전적(典籍) 등을 지냈다. 이어 정언·헌납·부수찬·지평 등을 거쳐 이조정랑에 올랐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제도도체찰사(諸道都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의 종사관으로 수행해 많은 활약을 했으며, 교리에 재임 중 독운어사(督運御史)로 나가 군량미 조달에 많은 공을 세웠다. 그러나 조정에서 동서분당이 생겨 김용을 후원하던 영의정 류성룡(柳成龍)이 서인에 의해 축출되자, 탄핵을 받아 선산부사로 옮겨졌다. 이때 금오서원(金烏書院)을 이건하고 향교를 중수하는 등 문교에 힘썼다. 이후 계속되는 대간의 탄핵을 받으며 중앙 관직과 지방 관직을 전전하였다. 일시 제용감정(濟用監正)·세자필선(世子弼善)·집의(執義) 등 중앙 관직에 머물다가 예천군수·상주목사·홍주목사 등의 지방 관직을 지내면서 오직 백성의 보호와 학문의 진흥에 힘썼다. 1609년 봉상시정으로 춘추관편수관을 겸해 선조실록(宣祖實錄)의 편찬에 참여했으며, 그 공으로 통정대부에 올라 병조참의를 지냈다. 그 후 1616년 60세의 나이로 여주목사로 나갔다. 조정의 당쟁이 날로 심해지자 맏아들의 죽음을 구실로 향리로 돌아왔다가 4년 뒤에 졸하였다. 임호서원(臨湖書院)·묵계서원(默溪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운천집(雲川集), 운천호종일기(雲川扈從日記 / 보물 제484호) 등이 있다.

 

전경 (사진. 문화재청)

 

 

 전하는 이야기

의성김씨 귀봉종택에는 대대로 전하는 세 가지 소중한 보물이 있다. 그 첫째가 신라 경순왕 옥적(玉笛/옥피리), 둘째가 연하침, 셋째가 매화연이다.

 

옥적은 신라 경순왕이 황색과 청색으로 된 한 쌍의 옥적을 만들게 하였는데 그 황색의 것은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청색의 옥저는 넷째 아들 석(의성김씨 시조공)에게 물려주어 현재 후손인 김종해(金鍾海) 씨가 보관해오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수백 년 전에 경주의 황색 옥적이 네 동강으로 갈려졌다는 얘기를 듣고 김씨 종택에 있는 청색 옥적을 꺼내 보았더니 놀랍게도 똑같이 네 동강으로 부러져 있었다 한다. 참 신기하고도 괴이한 일이었다. 약 백년 전에 영해부사 김희주 공이 옥적의 궤 뚜껑 안에 천년 유물이 네 동강이 난 것은 한스러우나 자손들은 길이 잘 보존하라고 적어두었다.

 

연하침은 운천 선생의 셋째 아들 경재(敬齋) 김시정(金是楨)공의 아들인 경와(敬窩) 김휴(金烋)공이 금강산에 유람을 갔을 때 일이다. 어느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 만폭동 청룡담을 찾아갔다. 청룡담 못 위에서 안개가 피어오르고 있어 너무 기이하여 하인을 시켜 못 속을 수색하게 하였더니 나무부리 같기도 하고 돌덩이 같기도 한 이상한 물건을 건져왔다. 그것은 보통 나무보다 훨씬 무거웠다. 나무뿌리가 물속에서 천년을 묵으면 침향이라는 만병통치의 한약 약제가 되고 또 다시 더 오랜 세월을 거치면 침석이 된다고 하는데 혹시나 이것이 침석은 아닐까 짐작할 뿐이었다.

 

백년 전 즈음 한 종손이 자기 눈으로 직접 안개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기 위하여 지금 백운정 정자 아래 냇물 속에 담가두었다가 급한 물살에 이것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아무리 찾아도 결국 찾지 못해 아주 잃었다고 단념하였었다. 그 이듬해 여름, 어떤 등짐장수가 이 마을을 지나면서 자기는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는데 일전 어느 강변을 지나가다 보니 해가 중천에 뜬 대낮인데 물 위에서 안개가 피어오르고 있더라고 마을 사람들에게 신기한 듯 이야기를 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종손은 그곳으로 달려가 수색하여 연하침을 찾았다고 한다. 잃어버린지 1년 만에 다시 찾은 셈이었다.

 

끝으로 매화연은 조선 선조 때 승지 백암 김륵 공이 명나라 사신으로 갔다가 명나라 신종황제로부터 기념품으로 하사받았다고 한다. 이것이 의성 김씨댁으로 넘어오게 된 데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김륵의 외손이 되는 경와 김휴 공이 어릴 때 외가에 놀러 갔다가 그 벼루가 탐이 났다. 그래서 외조부에게 달라고 졸랐다. 백암 공이 이르기를 “나는 공부를 열심히 하여 입신양명한 대가로 얻은 것인데 너는 아직 이룬 것 없이 그냥 얻으려 하느냐 친손이든지 외손이든지 먼저 과거에 급제하는 사람에게 주겠다.”고 약속했다. 경와 공은 그로부터 열심히 학문에 정진하여 14세에 초시에 급제했다. 과거 급제의 소식을 듣고 그는 집에도 들리지 않고 바로 외조부 댁에 찾아가서 벼루를 받았다. 이 벼루는 중국 황하 유역의 단애석으로 세로 34cm 가로 22cm의 장방형에 매화·대·구름·해·산·사슴 등이 교묘하고 아름답게 새겨져 있어서 보는 사람들은 모두 감탄한다고 한다.


코멘트 쓰기
코멘트 쓰기

봉화발효식품   대표 : 김종례  

경북 봉화군 물야면 소백로 4347-1  

TEL : 054-672-7589, 010-8907-7589  

통신판매업신고 : 2005-경북봉화-0008   사업자등록번호 : 512-05-30958  

개인정보관리책임자 : 김종례(이메일: pokk8647@naver.com)

비밀번호 확인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