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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경산과 낙동강 절벽 위의 觀水樓
Date : 2021-11-16
Name : 장 선녀 File : 20211116185141628.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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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경산과 낙동강 절벽 위의 觀水樓

 

  글. 안종화

 

  

단밀면의 대표 명승지를 나열하자면 만경산과 낙동강 그리고 옛 낙정(동)나루 바로 옆 북쪽 절벽 위에 자리하고 있는 관수루가 아닐까? 안동 영호루(映湖樓)에 남긴 김종직(金宗直)의 기(記)는 “같이 낙동강(洛東江) 언덕에 버티고 선 관수루(觀水樓)와 월파정(月波亭)은 영호루와 갑·을(甲乙)을 다툴 수 없다.”고 하였다. 하지만, 이곳 ‘관수루1)’를 명루(名樓)라고 하는 것은 그 이름처럼 물을 바라보며 오묘한 이치를 깨닫게 해 주는 장소이기 때문이지 누의 크고 작음 때문은 아니다. 누각 위에 남겨 둔 선조의 제영 시문(題詠詩文)을 살펴본 뒤, 상락 사람들이 덕산(德山)이라 칭송하던 만경산에도 올라보자. 낙동강 주변 풍광이 한눈에 바라보인다.

1) 고려 중엽 창건되었으며, 1874년(고종11)에 강물에 떠내려간 후 중건하지 못하다가 116년 만인 1990년 5월에 복원되었다.

 

낙단보와 낙동강변 관수루 (우측 절벽 위 건물)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의 관수루에 오르다(登觀水樓)

 

모래톱에 늦게 닿은 조각배들

어지러이 오가는 소와 말

강산은 만고에 이와 같은데

인물의 일생 오래도록 쉬게 되네.

저녁 해는 벌써 지니 물결만 아득하고

흐르는 물 쉬지 않아 생각이 깊어지네.

배를 대고 홀로 서니 황혼이 오래인데

쌍쌍의 백구는 물결을 치며 돌아드네

晩泊沙汀葉葉舟

紛紛去馬與來牛

江山萬古只如此

人物一生長自休

西日已沈波渺渺

東流不盡思悠悠

停舟獨立曛黃久

掠水飛回雙白鷗

 

 

 

 

위의 시는 물을 바라보며 자신의 삶을 돌이켜 보는 작품이다. 강산은 세월이 흘러도 변함이 없으나, 사람의 일생은 유한함을 노래하고 있다. 이어서 황혼이 되어 끊임없이 흘러가는 물을 바라보며 스스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 가, 어찌 살 것인가 생각이 깊어진다.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은 “물이 끊임없이 흐르기  위해서는 수원이 풍부해야만 하며, 도를 완성하고자 수양하는 자는 근본이 확립되어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반면에 노자는 “물처럼 다툼이 없는 것이 도에 가깝다.”고 하였다. 한결같은 모습으로 빈 곳을 채우며 지속해서 평생을 추구해야 하는 것이 학문이다. 돌아드는 백구를 바라보며 시를 매듭짓고 있다.

 

2) 『孟子』卷之八原「離婁章句下」에서는 “맹자가 답하기를 근원이 있는 샘은 쉬지 않고 솟아나 밤낮으로 그치지 않고, 흘러서 웅덩이를 채운 뒤에 나아가 바다에 이른다. 근본이 있는 것은 이와 같으니, 이 점을 취하신 것이다. 만약 근원이 없다면 7, 8월 사이에 집중 호우가 내려서 도랑에 모두 물이 가득 찼다가도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금방 말라 버리고 말 것이다. (孟子曰 原泉混混 不舍晝夜 盈科而後進 放乎四海 有本者如是 是之取爾 苟爲無本 七八月之間 雨集 溝澮皆盈 其涸也)” 『論語』 卷之二 「爲政」에서는 “첫째 배우는 사람이 충분히 침잠하고 음미해야지 등급을 뛰어넘어 나아가서는 안 됨을 보이고, 둘째 배우는 사람이 나날이 나아가고 다달이 진보해야지 중도에 그만두어서는 안 됨을 보인 것이다. (一以示學者當優遊涵泳 不可躐等而進 二以示學者當日就月將 不可半途而廢也)”  

3) 『道德經』제8장에서는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은 것이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으며, 남들이 싫어하는 곳에 머문다. 그럼으로 도에 가깝다.(上善若水 水善利萬物而不爭 處衆人之所惡 故幾於道)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낙동 관수루(洛東 觀水樓)

 

낙동강4)은 우리 남쪽 나라에서

뭇 강물의 으뜸이다.  

다락의 이름은 오묘한 이치를 알게 하고

땅의 형세는 웅대하게 분리됨을 보네  

들은 넓어 연기가 나무숲에 엉기고

강은 맑아 비 온 뒤 구름 걷혔네.  

홀홀히 역마를 재촉해 달리는 것은 

공문을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네 

洛水吾南國

尊爲衆水君

樓名知妙悟

地勢見雄分

野闊烟凝樹

江淸雨捲雲

怱怱催馹騎

要爲趁公文

 

 

낙동강은 하천 길이 510.36㎞로 압록강과 두만강 다음으로 길다. 관할로 볼 때 강원도, 경상도와 전라도 8개 시·도가 해당하며, 유역면적이 23,384㎢나 된다. 우리나라 남쪽 지방에서 으뜸이다.

 

낙동강에 위치한 ‘관수(觀水)’라는 다락 이름은 오묘한 이치를 일깨워 준다고 하였다. 오묘한 깨우침을 느낄 수 있는 훌륭한 장소라 하였다. 물결을 바라보며 깨우침을 가지는 것은 성현들의 수양법 가운데 하나였다. 끊임없이 흐르기 위해서는 물이 풍부해야 하듯 자신의 학덕을 넓고 깊게 쌓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스스로 끊임없이 노력할 필요가 있다. 수련(首聯)에서는 물을 예찬한 공자의 정신5)을 한 번쯤 되새겨 볼 일이다.

 

함련(頷聯)에서는 가락국(또는 가야)과 신라 그리고 좌도와 우도 두 지역으로 분리하던 웅대한 낙동강과 그 주변 경관을 보며 “연기는 나무숲에 엉기고 강은 맑아 비 온 뒤 구름 걷혔다.”고 하였다. 버들잎 새순이 돋아나 파르스름한 것이 연기와 같다. 거기에 저녁때쯤 석양과 함께 밥 짓는 연기와 엉긴다면 푸른빛이 더해지는 것이다. 비 개고 난 뒤, 먼지 낀 거울을 닦아낸 듯 영롱한 강변 풍경을 보고 마음을 맑게 가지니 근심과 걱정이 사라졌음을 표현한 것이다.

 

퇴계 이황이 1535년 35세 되던 해 어느 여름날 호송관(護送官)으로서 임무를 수행하던 중에 비를 피하려 잠시 관수루에 올라 지은 것이다. 미련(尾聯)에서는 좀 더 머무르고 싶으나 공문 전달을 위하여 말고삐를 당긴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있는 낙동진(나루)은 조선시대 경상도와 서울을 잇는 영남대로(嶺南大路)를 이어주는 역할을 하였으며, 주요한 길목에 해당하였다.

 

이곳에서 1리쯤 떨어진 낙동리(현 낙정리)6)에 역이 있었다. 허전(許傳)은 그의 시에서 나루에 정박한 소금 실은 범선을 이야기하고 있다. 1909년 1월에 발간한 「대한상업지리」에 의하면 부산 하구에서 소강 종점인 낙동역까지의 거리는 700리라 하였으며, 배와 뗏목을 이용한 물건 수송이 전국 제일이라고 하였다. 조선 후기까지 과거를 보러가는 자들과 공무를 수행하기 위한 자 그리고 장사를 위해서 지나가던 상인들이 잠시 누각에 들러 쉬어갔다. 1780년(정조 4) 노상추 일기를 보면 관수루 아래 도착하니 저녁이 되어 낙동역의 역촌(驛村)에 들어가 유숙(留宿)하였다고 한다.

 

4) 하천길이 510.36㎞로 압록강, 두만강 다음으로 길다. 황지천의 상류인 강원도 태백시 화전동 삼각점(1442.3m) 동쪽 계곡에서 발원하며, 하구부(종점)은 부산광역시 사하구 하단동 지점에서 남해안에 유입된다. 

5) 『論語』卷之七 「雍也」에서는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하며, 지혜로운 사람은 동적이고 어진 사람은 정적이며, 지혜로운 사람은 낙천적이고 어진 사람은 장수한다.(知者樂水 仁者樂山 知者動 仁者靜 知者樂 仁者壽)”고 하였다.

6) 고려 때 백운 이규보가 의성 땅을 다녀가며 관수루에 올라 시 한 수를 지었다. “가을 물은 압록 ․ 두만강처럼 푸르고(秋水鴨頭綠), 새벽노을은 성혈(猩血)처럼 붉도다(曉霞猩血紅).”라고 표현하였다. 한 폭의 그림을 연상케 하듯 그 묘사가 절묘하다. 그런 그가 대곡사에 들르기 전 용암사 문 앞의 우물 맛을 보니 얼음물인 듯 시원하며 맛이 좋았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낙동리’로 불리던 마을 이름이 어느 순간 낙정리로 바뀌었다. 관수루가 자리한 곳 부근에 나루터가 있었으며, 조선시대 경상도와 서울을 잇는 영남대로(嶺南大路) 주요 길목에 위치한 까닭에 군사적으로도 중요하여 1명의 장교와 45명의 군이 주둔해 있었고 큰말 3필, 중말 2필, 그보다 못한 말 8필과 역무를 담당하는 관리 490명, 잡일을 맡은 사람 35명, 머슴 13명을 두던 낙동역이 있었다.

 

 

 

 

강고 류심춘(江皐 柳尋春) 박관수루(泊觀水樓) 作 13절 중 11절

 

〈맹자〉책 가운데의 글을

퇴계 선생께서 벽 위에 쓰셨다.

물 보는 데서 진실로 묘한 이치 생긴다고 하니

이 말씀 어찌 나를 속이리오.

鄒聖書中語

退翁壁上題

觀水固有術

斯言豈余欺

 

관수루는 안동의 영호루, 밀양의 영남루와 함께 낙동강 3대 누각의 하나이다. 낙동강과 위천 두 강물과 팔공과 보현·문수지맥 산줄기 셋이 만나는 이수삼산(二水三山)의 지점에 지어진 이 누각에 오르면 이규보와 김종직, 안축 등이 쓴 13개의 시판이 있다. 

 

 관수루에 걸려있는 시판들, 퇴계 선생의 낙동 관수루에 대한 글은 주루에도 있다. 

 

 

그중에「맹자」에서 물을 예찬했던 공자의 가르침에 공감한 퇴계의 시판이  있다. 퇴계 선생의 시판을 우러러보며 되풀이하여 기억하고 음미하던 중 ‘물을 바라보는(觀水)’ 의미를 담아 시를 쓴 것이 많았다. 선생이 관수루에 올라서 쓴 또 다른 시를 보면 ‘나는 듯한 누각이 언덕 동쪽에 나래 폈는데, 오래 서 있으니  겨드랑이에서 바람이 이네’라 하였다. 승경지에서 자연과 하나 되어 비상(飛翔)하려는 기상을 묘사하였다.

 

영남의 선비들은 오래전부터 낙동강에서 뱃놀이하면서 시회를 열었다. 그중 낙강시회는 1196년 백운 이규보(白雲 李奎報)가 최초로 연 이래 1862년 계당 류주목(溪堂 柳疇睦)의 시회까지 50회 이상 열렸다. 끝없이 흘러가는 물이 도를 완성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유자(儒者)의 모습과 유사하다. 그런 물을 볼 수 있는 낙동강변 관수루 위에 오른 많은 이들이 시를 지었다. 1772년(영조48) 8월 10일 노상추 일기에 의하면 이날도 원근 사람들이 관수루에서 열린 사설(私設) 백일장에 참여하였다고 한다.

 

누각 위에 올라 주변 경관과 물고기와 새들이 노니는 광경만 바라보기만 할  것이 아니라 한 번쯤 옛 군자들의 편액 시도 읽어보고 흐르는 물도 바라보면서 묘한 이치를 깨닫기 바란다. 물을 바라보는 방법(觀水有術)의 하나는 그 물결을 바라보는(必觀其瀾) 것이다. 퇴계선생은 다락의 이름이 오묘한 이치를 일깨운다 하였다. 그 말씀에 어찌 거짓이 있으랴.

 

 

 

 

 

권오복(權五福)의 낙동강 관수루에 오르다(登洛東江 觀水樓)

 

이 한 몸 하늘과 땅 사이에 하나의 빈 배 같은데

무술 닦던 그 당시엔 북두성과 견우성도 쏠 듯했네

얽매였던 생각을 돌이켜보니 낙락할 뿐

벼슬길 이제부터 편히 쉬게 되리라

영웅은 만고에 몇 분이나 계셨던가

어스름 달빛만이 빈 강에서 흥을 돋우네

물을 보고 산을 봄을 가히 즐길 만하니

백구도 나를 잊고 나 또한 백구를 잊네

是身天地一虛舟

劍氣當年射斗牛

羈思向來何落落

宦情從此便休休

英雄萬古幾人在

煙月空江引興悠

觀水觀山皆可樂

鷗來忘我我忘鷗

 

관수루 경관을 바라보며 젊은 시절의 서슬 퍼렇던 의협심도 지나간 일임을 돌이켜 보면서, 즐거운 시절이었다는 생각을 한다. 벼슬길을 그만두는 이 시점에 이르러 생각하니 영웅의 일생 또한 헛되고 덧없다.

 

마지막으로 자연 속에서 생활하는 것이 즐거운 것임을 말하여 주고 있다. 백구(白鷗)도 나를 잊고, 나도 백구(갈매기)를 잊는다. 마음을 비우니 백구와도 서로 화합할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이다.

 

물을 바라보며 선인들께서 남기신 시를 읊조리며 깨닫는 바 있었다면, 이제는 산에 올라볼 차례다. 관수루를 기점으로 만경산 정상까지 등산로가 잘 다듬어져 있다. 낙단보 등 강 주변 풍광을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도 있다.

 

고려 황보탁의 글에 의하면 태조가 삼국을 통일한 다음 그 기념으로 만경산 동남쪽 모퉁이에 용암사(龍巖寺)를 세웠으며, 이후 명종 4년 농민항쟁에 불법(佛法)으로 풍속을 교화하고자 중창한 것이다. 백운거사(白雲居士) 이규보(李奎報)가 쓴 용암사에서 묵는(寓龍巖寺)다는 제목의 시가 동문선에 전해져 지금은 없어진 당시 사찰 풍경을 담고 있다.

 

진세의 속박 이르지 않은 곳이라

흰 구름 속의 중은 절로 한가하네

가득한 안개에 황혼의 나무들 시름겹다

소나무 빛은 가을 산을 수호하네

지는 해에 쓰름매미 울어대고

넓은 하늘에 지친 새[倦鳥]는 둥지로 돌아가네

병중이라 찾는 손[客] 두려워

대낮에도 솔문을 걸어놓고 있네

羇紲不到處

白雲僧自閑

煙光愁暮樹

松色護秋山

落日寒蟬噪

長天倦鳥還

病中深畏客

白晝鎖松關

 

속된 나그네가 이르지 못하는 곳이니 스님은 저절로 한가하다는 것이며, 음산하니 안개가 저녁까지 숲을 덮고 있으니 나그네는 시름이 겹다는 것이다. 온 산이 붉게 물들었으나, 소나무만은 푸른빛을 잃지 않고 가을 산을 보호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지는 해에 매미가 춥다고 울어대는 세속으로 돌아온 것이다.

 

지친 새가 둥지로 돌아가듯 세속의 삶에서 벗어나 한가하게 살고 싶다는 뜻을 나타내고 있으며, 마지막 구절에는 병든 스님이 손님을 싫어하여 늘 문을 닫아 걸어놓은 것을 보고 은근 부러워하는 작가의 속내를 보여주고 있다.

 

미수(眉臾) 허목(許穆)이 쓴〈기언별집(記言別集) 제20권 구묘문(丘墓文)편 박송당 선생 갈명(碣銘)〉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정붕(鄭鵬)이 냉산(冷山)을 가르키며 박영에게 묻기를 “산 너머에 무엇이 있는가?”하자, 선생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나중에 다시 묻기를 “그대는 산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아는가?” 하니, 박영이 대답하기를 “산 너머에도 산이 있습니다.”고 하였다. 관수(觀水)하는 것과 함께 사물의 현상 속에 내재한 이치를 탐구해서 나의 앎을 완전하게 이룰 수 있도록 하는 격물치지(格物致知)에 대한 이야기이다. 산마루를 따라 남으로 향하면 냉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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